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라위 왕조 (문단 편집) === 전성기? : 물라이 이스마일 === ||[[파일:모로코 이스마일.jpg|width=400]]||[[파일:모로코 물라이 이스마일.jpg|width=350]]|| |||| 물라이 이스마일 빈 샤리프의 초상화 |||| 페스에서 술탄에 오른 26세의 이스마일은 보다 더 국토 중앙부에 위치한 [[메크네스]]로 천도하였다. 다만 그는 곧 조카 아흐마드 벤 마레즈와 동생 하란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전자는 마라케쉬에서 술탄을 칭하였고, 후자는 시질마사에서 자립하였다. 또한 테투안의 군벌 카디르 갈리안 역시 복속을 거부하였다.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한 이스마일은 즉위한지 2주도 되지 않은 4월 27일 마라케쉬로 남하, 포병대의 활약과 함께 도시를 점령하였고 총상을 입은 아흐마드는 산지로 도주하였다. 6월 4일 이스마일은 마라케쉬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았고 도시에 관용을 베푼 후 북상, 페스에서 알 라시드의 장례를 치르고 메크네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직후 페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알라위 주둔군이 축출되었다. (1672년 8월 26일) 페스 반군의 초청을 받은 아흐마드는 타자에 이르러 재차 술탄을 칭하였고, 알 라시드의 사후 오스만 지원과 함께 테투안으로 돌아온 카디르 갈리안 역시 이에 호응하였다. 이스마일은 페스를 봉쇄하게 한 후 타자로 진군, 수개월 간의 포위 끝에 도시를 항복시켰고 아흐마드는 사막으로 도주하였다. 그후 1만 2천 병력과 북상한 이스마일은 북부 지방을 잠식해 가던 카디르 갈리안을 크사르 엘 케비르에서 전사시켰다. (1673년 9월 2일) 이렇게 북부를 평정한 그는 페스로 귀환하였고, 14개월의 포위 끝에 도시는 항복하였다. 이스마일은 약속대로 주민들을 사면하였고 그 지배 구조를 개편하였다. 한편 반란을 진압하며 이스마일은 기존 구유쉬 아랍 병력 대신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한 10만 흑인 부대[*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 혹은 그 후손들]인 아비드 알 부카리를 핵심 병력으로 삼았다. 이스마일 역시 흑인 모친을 두어 과거 [[아불 하산 알리]]처럼 흑인 술탄으로 불렸고, 흑인 부대는 그에게만 절대 충성하였다. [[파일:모로코 메크네스 2.jpg|width=760]] [[메크네스]], 카스바 정문 일대의 성벽 제국을 안정시킨 이스마일은 새 수도 메크네스에 둘레 8km에 달하는 카스바를 건설하였고, '모로코의 자금성'으로도 불리는 이 궁전도시는 반세기 이상 공사가 지속되었다. 그는 또한 오스만 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동쪽 국경을 따라 요새들을 건설하고 흑인 친위대를 배치하였다. 한편 이전 사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의 간섭은 이어졌다. 1668년 멸망 후 틀렘센에 망명했던 달라이야 공동체는 오스만 조의 지원을 받아, 옛 수장 무함마드 알 핫즈의 손자 아흐마드 앗 달라이 하에 규합하여 모로코로 돌아왔다. 1677년 그들은 알라위 군을 격파하고 중부 지방의 타들라를 점령했는데, 1678년 4월 와디 알 아비드 근처에서 이스마일이 보낸 토벌군에게 격파당하였다. 도주한 아흐마드 알 달라이가 1680년 초엽 병사하며 반세기 가량 이어진 달라이야 공동체는 마침내 소멸하였다. 보복으로 이스마일은 1679년과 1682년 오스만령 알제리를 습격하게 하였고, 1686년에는 역시 오스만측 지원을 받아 수스 지방에 할거하던 조카 아흐마드를 [[타루단트]] 부근에서 격파하고 제거하였다. 이로써 모로코는 이스마일 휘하에 확고히 통합되었다. 이스마일은 또한 사드 왕조의 쇠퇴로 자립한 말리의 파샤 정권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였다. 1645년부터 알라위 조에 복속하던 알제리 중남부 투아트 오아시스에 대해 그는 1676년 태수를 파견해 직접 지배에 나섰고, 1678-79년 현 [[모리타니아]] 서남부인 트라르자, 브라크나 부족들을 복속시켜 [[세네갈 강]]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편 1662년 포르투갈-잉글랜드 혼인 동맹[* 주앙 4세의 딸 카트린느와 [[찰스 2세]]의 결혼]으로 탕헤르가 지참금으로써 잉글랜드에게 넘겨졌고, 1680년 여름 그에 대한 이스마일의 포위는 실패하였다. 다만 리프 군대[* 이들은 1664년 5월 영국인 총독을 습격해 살해한 바 있다] 혹은 무자헤딘이라 불린 현지 전사들이 지속적으로 공격과 봉쇄를 가한 끝에 1684년 2월 영국 주둔군은 도시를 파괴하고 철수하였다. 즉시 탕헤르를 접수한 이스마일은 도시의 재건과 재정착을 장려하였고 리프 군대를 이끈 테투안 총독 알리 알 리피에게 자치적인 지배권을 주었다. 이후 리피 가문은 1912년까지 탕헤르와 테투안의 총독직을 이어간다. 그외에 이스마일은 1681년 메흐디야, 1689년 [[라라슈]] (알 아라이쉬), 1691년 [[아실라]] 등 스페인령 서북 해안의 도시들도 재정복하였다. [[파일:모로코 궁전 1.jpg|width=760]] 이스마일의 마굿간. 1만 2천 필의 말이 사육되었다고 한다. 이스마일은 모로코 해적들로 유럽 상선들을 공격함과 동시에 유럽 상인들의 무역을 허가하였다. 다만 외국 상인들의 행동은 철저히 규제되었고 총독들에게 관세를 바치며 합의해야 했다. 포로로 잡힌 유럽인들은 석방 전까지 노역에 동원되었고,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중재로 석방되었다. 또한 1682년부터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대스페인 동맹을 모색하였으나 후자의 무관심으로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던 1692년 봄 알제 총독 핫즈 샤바니가 1만 5천의 병력과 함께 [[우지다]]를 지나 진격하였다. 이에 이스마일은 2만 대군을 모아 반격에 나섰으나 물라야 강 전투에서 5천을 잃고 대패하였다. 알제리 군은 페스 성벽까지 패잔병을 추격하였는데, 그곳에는 4만이 넘는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기에 진격을 멈추었다. 이스마일은 반격에 나서는 대신 친히 적진을 방문하여 오스만 술탄에게 복속을 표한 후 물라야 강을 경계로 삼아 화친하였다. 이로써 우지다는 한세기 이상 오스만령 알제리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로도 이스마일은 1693년, 1694년, 1701년, 1707년 재차 물라야 강 동쪽으로 습격대를 보내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693년의 경우 이스마일이 2만 대군으로 스페인령 [[오랑]]을 포위하자 알제 총독이 스페인을 지원하기도 했다. 1701년 초에는 모로코-튀니지-리비아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스마일의 아들 제이단이 [[틀렘센]]과 [[마스카라]]를 점령, 후자에 위치한 베이 궁전을 약탈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전리품을 지키기 위해 휴전을 맺고 점령지를 포기한 채 철수하였다. 분노한 이스마일은 제이단을 해임하고 친히 4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 알제리 중서부 [[츨레프]] 협곡까지 진격하였다. 휴전 동안 튀니지-리비아 군을 격파한 알제 총독 핫지 무스타파는 1만 대군과 함께 맞섰다. 1701년 4월의 전투에서 이스마일은 8천 병력을 잃고 겨우 도주하여고, 그의 말이 사로잡혀 루이 14세에게 보내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스마일의 남방 진출은 더 효과적이었고, 1696년에는 말리 북부의 타가자에 카디를 임명해 다스리게 하였다. 1724년에는 세네갈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에 맞서 트라르자 부족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 모리타니아 중북부 쉰게티에 태수를 봉하며 남쪽 국경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사하라 횡단 교역은 이전처럼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파일:모로코 메크네스 1.jpg|width=760]] 메크네스 카스바의 정원, 현재는 왕실 골프장이다. 이스마일은 하렘에 수천의 여인들을 후궁으로 두었고, 그들로부터 수백의 자녀를 얻었다. 정실 부인은 넷으로, 그들과는 10명의 적자를 두었다. 1700년경 환갑에 가까워진 이스마일은 적자들 중 아흐마드는 타들라, 압둘말리크는 다라 협곡, 무함마드 알 알람은 수스, 알 마문은 시질마사의 총독으로 봉하였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아들들 간의 분쟁이 심화되어 왕자 나세르가 압둘말리크를 패배시키고 다라를 차지했으나 이스마일에 의해 샤리프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이스마일이 가장 총애하던 부인 랄라 아이샤 무바르카는 친아들 제이단의 계승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에 장남 무함마드 알 알람이 반란을 일으켜 마라케쉬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1703년 3월) 이에 제이단이 토벌에 나서자 무함마드는 타루단트로 도주했다가 사로잡혀 한 팔과 한 손이 잘렸다.[* 이때 이스마일은 그의 피를 땅에 뿌리게 했는데 무함마드 후손의 피를 뿌리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불복한 도부수와 동의한 도부수 모두 처형하였다고.. 그해 7월 무하마드 알 알람은 메크네스에서 자살한다] 다만 무함마드 알 알람은 결국 자살하였고 제이단 역시 타루단트 주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1707년 이스마일의 지시로 취중에 부인에게 살해되었다. 나세르 역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총독에게 살해되었다. 결국 이스마일은 조용히 지내던 타들라 총독 아흐마드를 후계자로 삼았다. 한편 이스마일은 18세기 초엽 유럽을 뒤흔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오스트리아 편을 들었고, 1704년 영국의 지브롤터 점령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해 스페인의 [[펠레페 5세]]는 1720년 반격으로 1694년부터 모로코 측의 봉쇄에 놓여 있던 세우타에 함대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봉쇄는 풀렸으나 이스마일은 이듬해 재차 봉쇄를 이어가게 하였고, 대함대를 조직해 약화된 스페인 본토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1722년 폭풍으로 함대가 파괴되며 좌절되었다. 역사상 가장 긴 26년, 다시 7년간 이어지던 포위는 1727년 3월 22일 이스마일이 81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풀렸다. 55년에 걸친 이스마일의 치세 동안 모로코는 통합되었고 서/북 해안과 남쪽 사막 지대로 영토가 팽창되었다. 하지만 이스마일은 1699-1705년에 걸쳐 왕국 내의 21만에 달하는 모든 흑인들을 (심지어 무슬림이나 자유인까지) 노예화하는 잔혹한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후계자 아흐마드의 입지를 확고히 하지 못하여 사후 알라위 조는 30년에 걸친 내전에 시달리며 쇠퇴기를 겪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